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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11개의 대형사고

곽대감 2014. 8. 10. 12:29

광복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11개의 대형사고

 

 

 

 

이 글은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대형사고 중 사망자가 가장 많았던 11개의 대형사고를 소개한다. 홍수 등 자연재해와 테러 사건은 제외했다. 

 


순서는 사망자 수에 따른다.

 


 



1.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

 

- 501명 사망, 6명 실종, 937명 부상

 

- 오후 5시 52분,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의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면서 엄청난 규모의 사상자를 낳았다. 500명 넘게 사망한 '6.25전쟁 이후 최악의 재난'이었다. 성수대교 붕괴와 대구 상인동 가스폭발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의 일이었다. 

  

- 흔히 삼풍백화점을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가 낳은 참극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삼풍백화점은 극악무도한 건설비리가 원인이었다. 당초 삼풍백화점은 우성건설이 상가 용도로 설계해 짓고 있던 건물이었으나, 삼풍의 요구로 백화점으로 용도변경된 것이다. 우성건설이 안전성 문제를 근거로 용도변경을 거부하자 삼풍 이준 회장은 계약을 파기하고 그룹 계열사 삼풍건설에 공사를 맡겨 용도변경을 관철시켰다.

 

- 삼풍의 부실공사는 다음과 같다. 첫째, 매장 면적을 넓히기 위해 상가 내부의 벽들을 없애버렸다. 무게를 견디는 역할이 있는 건물 내부 벽을 없앤 것이다. 둘째, 바닥과 기둥을 연결하는 고리에 L자형 철근을 사용하는데, 건설비용을 줄이기 위해 ㅡ자형 철근을 사용했다. 건물 기둥의 힘이 그만큼 약화된 것이다. 셋째, 당초 4층짜리로 설계되었던 건물을 5층으로 확장했다. 넷째, 당초 롤러스케이트장으로 계획된 5층을 식당으로 용도변경하면서 무게 부담이 더 커졌다. 다섯째, 지하에 설치하기로 했던 냉각탑 4개를 옥상에 설치했다. 5층 식당과 냉각탑으로 인해, 당초 설계보다 100톤의 무게가 추가로 발생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비용을 아끼기 위해 필요한 건설자재를 충분히 사용하지 않는 등, 여러가지 부실시공의 양상이 드러났다. 이러한 부실공사는 당연히 전부 불법이었다. 삼풍은 서초구청에 뇌물을 주어 이러한 문제를 무마시켰던 것이 나중에 드러났다.

 

- 가장 충격적인 것은 건물이 붕괴 조짐을 여러 차례 드러냈는데도 영업을 계속했다는 것이다. 5층 천장에 균열이 생기고, 식당 테이블이 한쪽으로 기우는 모습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삼풍백화점은 보수공사로 땜질하는데 급급했다.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사건 당일 오전에도 에어컨이 정상 작동하지 않는 등 이상 조짐이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백화점 측에서도 그날 대책회의를 가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영업을 중지하지 않아 결국 수많은 손님과 종업원들이 사망했다.

경영진은 미리 대피해 목숨을 건졌다.

 

삼풍, 하루 전날의 모습

 

- 희생자 규모가 어머어마했기 때문에 이런저런 사연도 많았다. 1983년 버마 아웅산묘소 폭파테러로 순국한 서석준 전 경제부총리의 딸이 이 사고로 사망했다. 부인과 두 자녀를 모두 잃은 검사의 사연, 시각장애인 언니를 비롯한 세 자매가 모두 참변을 당한 사연은 시민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 기적적인 생존자들이 있었다. 최명석 씨가 사고 11일째에 구출되고, 유지환 씨가 13일째, 박승현 씨가 17일만에 구출되었다. 유지환 씨는 구출 후 "구조대원 오빠와 사귀고 싶다"는 말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무 음식도 없이 흐르는 물만으로 버텨내며 생존에 성공한 이들은 많은 감동을 남겼다. 그러나 유지환 씨와 박승현 씨는 가끔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끔찍했던 그 날의 트라우마가 남아 있음을 고백했다.

 

- 사태의 원흉, 삼풍그룹 이준 회장은 사건 후 수사를 받는 와중에 시종 당당한 모습을 보여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다. 기자에게 "여보쇼. 무너진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손님들에게 피해가 가지만, 우리 회사의 재산도 망가진거야", "(책임은) 그걸 알고 있는 사람한테 물어보시오" 등 도무지 죄책감을 보이지 않는 자세를 보였다. 그는 7년 6개월 복역 후 출소해 2003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2. 1970년 12월 14일 남영호 침몰

- 326명 사망

- 건국 이래 최악의 해난사고였다. 제주항에서 부산항으로 향하던 여객선 남영호가 새벽 1시 50분경에 남해상에서 전복되어 침몰했다. 탑승자 338명 중 단 12명만이 생존했다. 사망자는 대부분 제주도민이었다.

당초 남영호의 탑승자 수는 274명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확인 결과 338명이 탑승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남영호의 수용가능인원(302명)보다 더 많은 인원을 태웠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회사 측에서 승객 명부를 조작한 것이다. 그래서 희생자 중 64명의 이름이 승객명부에 적혀 있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남영호의 수용가능 적재화물량이 130톤이었으나, 229톤 가량의 화물이 적재되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 해경의 늑장 대처도 희생을 키웠다. 우리 해경이 남영호의 SOS 신호를 받고도 알아보지 못하면서 초동대처가 전혀 이뤄지지 못했다. 일본 언론이 사고를 처음 보도했는데, 보도가 나온 직후에도 해경은 '연락 받은게 없다'며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첫 보도가 나온지 2시간, 사고가 발생한지 12시간 만에 해경이 출동했다.

- 남영호 사건 후, '마포종점'으로 잘 알려진 은방울자매가 히트곡 '무정한 그사람'을 개사해 '밤항구 연락선'이라는 곡으로 새롭게 발표했다. '단장의 미아리고개' '울고넘는 박달재' 등을 작사한 故 반야월 선생이 작사했다. 그러나 '쌍고동에 허공실어 침몰된 남영호야'라는 가사 대목이 너무 직설적이었던걸까. 이 곡은 금지곡으로 지정되었고, 문제의 대목은 '쌍고동에 맹세걸고 떠나는 연락선아'로 바꾸었다.





3. 1953년 1월 9일 창경호 침몰

- 300여명 사망

- 1953년 1월 9일 오후 10시 40분경, 여수항에서 부산항으로 향하던 146톤급 여객선 창경호가 다대포 앞 거북섬 인근에서 풍랑과 파도를 맞아 침몰했다.
- 아무래도 50년대의 일이라 그런지, 희생자 통계가 확실하지 않다. 당시 사건 직후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236명 중 7명이 생존하고, 229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사건발생 2주 뒤, 1월 27일 경향신문 기사에는 26일까지 263구의 시체를 인양했으며, 사고 희생자가 3백여명으로 추산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건 후 12년이 지난 1965년 경향신문 기사에는 362명이 사망했다고 나와 있고, 1970년 기사에는 266명 사망으로 적혀 있다. '263구의 시체를 인양했다'는 기사가 가장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따라서 300여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 사고 원인은 1차적으로 강풍이었다. 그러나 창경호의 운영에도 문제가 있었다. 창경호는 만든지 20년도 더 된 화물선을 여객선으로 개조한 것이 밝혀졌다. 미군 폭격기에 의해 침몰했던 관부연락선 '천신환'을 수리한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탑승인원이 실제 수용가능한 인원을 넘어선데다가 쌀 200가마까지 실어 무게를 견디기 어려웠으며, 배에 비치되어 있었어야 할 구명보트와 구명복을 본사 창고에 넣어두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 당시 기사에 따르면 실종자 가족들이 부산항 부두에 몰려들어 혹시 모를 생존자의 귀환을 기다렸으며, 시체가 돌아올 때마다 부두가 이들의 울음으로 가득찼다고 한다. 

"창경호 침몰의 비보를 들은 부산 시내에 있는 승객의 가족들은 이른 아침부터 부산부두에 운집하여 그 가족들의 소식을 고대하고 있었으나 돌아오는 소식마다 전원사망이라는 슬픈 소식뿐. 구조선에 의하여 작일 12시경 비로소 인양된 5개의 시체가 부두에 닫자 가슴 조리던 가족들은 대성통곡하여 익사된 희생자들의 이름을 소리소리 부르는 등 번잡한 부두는 통곡의 울음소리로 뒤덮이고 있다."

- 사건 후 3년이 지난 1955년 12월 6일에서야 창경호가 육지로 인양되었다. 이때 배 안에서 이미 해골이 된 시체 1구를 발견했다고 한다.

- 창경호 책임자에 대한 재판에서 검찰은 창경호 선장 등 4명에 대해 사형을 구형했으나, 부산지법은 징역 3년형을 내렸다. 이에 대해 검찰이 불복하여 항고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상급심 결과는 찾아볼 수 없었다. 김석관 당시 교통부장관이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4. 1993년 10월 10일 서해훼리호 침몰

 

- 292명 사망


- 10월 10일, 오전 10시경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 앞바다에서 서해 훼리호가 침몰하여 292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 희생자들은 주로 주말 낚시꾼들이었다. 선박의 정원이 원래 221명이었는데, 실제로 362명이나 탑승한 것이 화근이었다. 또한 날씨가 좋지 않았음에도 무리하게 출항했다가, 결국 회항하려 배를 돌리는 순간 사람들과 화물이 한 쪽으로 쏠리면서 배가 침몰했다. 안전요원이 없어 사람들이 구명조끼를 찾지 못하고, 불안에 떤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침몰이 가속화되어 피해가 커졌다. 

 

- 당시 탑승객들이 차분하지 못한 탓에 사태가 커졌기 때문에 '후진국적' 시민의식을 드러냈다는 자조섞인 이야기가 많았다. 그러나 배에 안전요원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회사 자금난으로 운영에 어려움을 겪던 서해 훼리호가 무리하게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악천후에도 무리하게 출항한 것이 원인이었다.

- 서해훼리호 희생자 292명의 시신을 전부 뭍으로 인양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해난사고의 특성 상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군경과 인근 어민들의 협력이 있었으며, 구조대원 중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중상을 입는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 원래 다른 가수가 불렀던 '님실은 페리호'라는 곡을 가수 강달님이 서해훼리호 사건에 맞게 개사하여 불렀다.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가는 목이메인 페리호야, 님을 보낸 정든 항구 비에 젖어 울고 있다"


시대가 바뀌긴 바뀌었다. '침몰한 남영호'를 부른 은방울자매와 달리 금지곡이 되지는 않았으니. 그러나 이 곡은 크게 히트하지 못 했다.

 

 

 

5. 1997년 8월 6일 괌 KAL기 추락

  

- 225명 사망, 29명 부상

 

- 현지시각 오전 1시 42분(한국시각 오전 12시 42분), 김포공항을 출발해 괌 공항으로 향하던 대한항공 801편 여객기가 착륙에 실패해 추락해 228명이 사망했다. 괌 안토니오 비 원 팻 국제공항은 당시 태풍으로 인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조종사들의 실수와 관제탑 경보기기의 고장이 원인이었다. 또한 괌 공항이 다른 미국의 국제공항들과 다른 방식의 경보 시설을 운용하고 있었던 것이 기장을 혼란케 했다는 지적도 있다. 

 

- 공항 관제탑 시설의 고장이 원인으로 인정되면서 미국 정부가 사망자 유가족과 부상자들에게 배상금을 주었다. 여름 휴가철이라 신혼여행 부부와 휴가 온 부부들이 많이 목숨을 잃었다. 故 신기하 국회의원 부부가 이 사고로 사망했다.

 

- 7월 7일 샌프란시스코 공항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사고는 관제탑 시설의 고장, 조종사의 미숙함이 원인으로 보이는데, 97년 괌 추락사고와 거의 동일하다. 

 

 


6. 200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 화재

 

- 192명 사망, 148명 부상

 

- 오전 9시 53분, 대구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에서 열차가 정차하기 직전에 57세 지적장애인으로 알려진 김대한이 휘발유가 담긴 페트병과 라이터를 던져 화재가 일어났다. 승객 192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공식 발표되었다. 수습된 시신 중 6구는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공식적으로 192명이 사망했지만 사건 당시 실종된 21명의 행방을 찾지 못해 실제 사망자 수는 더 많을 것이라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정부가 사회적 파장을 두려워 해 사망자 수를 200명 이내로 맞춘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개인의 돌출행동을 막을 수는 없었겠지만, 화재 피해가 확대되는 것을 막을 수는 있었다. 무엇보다도 가연성이 높은 지하철 객차의 시트가 문제였다. 특히 수출용 지하철 열차는 모두 불연재 의자로 제작하면서, 국내 지하철은 가연재 시트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이 사건 이후로 국내 모든 지하철이 불연재로 교체되었다. 또한 개인이 휴대할 수 있는 휘발유 페트병이 공공연히 판매되는 것이 문제시되었다.

 

- 이 사건은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을 1주일 정도 남겨둔 상황에서 터졌다. 김대중 전임 대통령은 퇴임을 시끄럽게 기념하는 것이 시기적으로 적절치 못 하다고 판단해 모든 퇴임 관련 행사를 취소했고, 노 대통령은 대통령취임사의 도입 부분에서 희생자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대구지하철 사고 외에도 대통령직 인수인계 기간에 대형사고가 터진 적이 몇 번 있다. 1993년 노태우-YS 인계 중 청주 우암상가아파트 붕괴, 2008년 노무현-이명박 인계 중 숭례문 화재, 2013년 인사동 대형화재가 대표적이다.

 

 

 

 

7. 1971년 12월 25일 대연각 호텔 화재


- 163~167명 사망, 68명 부상


- 서울시 중구 명동, 지금도 신세계백화점 건너편에 고려대연각빌딩이 있다. 71년 화재 전까지 호텔로 사용된 건물이다. 1971년 크리스마스 아침 대연각호텔 1층에서 가스가 폭발하여 건물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불길이 워낙 거셌던데다가 건물 내부에 스프링쿨러와 방화벽 등 소화장치가 전혀 없어 불길을 빨리 잡지 못 해 10시간만에야 진화되었다. 160여 명이 사망했는데 대부분 질식사였지만, 38명은 화마와 질식을 피하느라 고층에서 투신해 사망했다.


- 역대 세계 호텔 화재 사건 중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내고, 한국의 모든 화재 사건 중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1974년 미국에서 이 사건을 소재로 영화 '타워링'이 제작되었으며, 지난해 말에 개봉한 설경구, 손예진, 김상경 주연의 '타워'도 이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 

 

 

 

8. 2002년 4월 15일 김해 민항기 추락

 

- 128명 사망, 39명 부상 

 

- 베이징공항을 출발해 김해공항으로 향하던 에어차이나 129편 민항기가 착륙에 실패해 인근 산에 충돌했다. 사망자 중 109명이 한국인, 18명이 중국인, 1명이 우즈베키스탄인이었다. (* 중국 언론이 '우리 입장에선 다행이다'라고 보도했으면 어땠을까?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채널A의 보도행태는 분명히 비판받아야 함..) 

 

- 사고 원인은 기장의 조종 미숙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착륙하던 중 구름에서 시야를 잃고 활주로 위치를 찾지 못 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건에 한국과 중국의 국가간 관계가 걸려 있어 사건조사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한국, 중국, 미국 3국이 공동 조사하여 3년만에 결과를 발표했다. 중국은 관제탑의 책임을 줄기차게 주장했으나 최종 조사 결과에 반영되지 못 했다.

 

- 에어차이나 사와 유족들의 재판이 장기화되면서 사망자들이 10년이나 장례를 치르지 못 했다. 에어차이나 사는 조종사의 과실이 크지 않다며 이에 해당되는 국제 규약에 따라 유족들에게 '2500만원 이내' 보상금을 지급하겠다고 버텼고, 희생자 유족들은 이에 반발하여 지지부진한 재판이 진행되었다. 2009년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져 에어차이나 사가 유족들에게 8억원 보상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으나, 에어차이나 사가 장례비용에 대해선 책임이 없다고 버티면서 장례가 한동안 진행되지 못 했다. 지난해, 사고 후 10년만에 사망자들의 유골이 김해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9. 1995년 4월 28일 대구 상인동 가스폭발


- 101명 사망, 145명 부상


- 새벽 7시 50분, 대구시 상인동 영남중고 앞 대구지하철 1호선 공사장에서 가스가 폭발했다. 인근 백화점 건설 공사장에서 작업 중 가스관이 파손되어 가스가 지하철 공사장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폭발이 일어났다. 

 

인근 차량 152대와 건물 80여 채가 파괴되고, 101명이 사망했다. 출근길 시민들과 통학길 학생들이 주로 희생당했다. 영남고 학생들의 등교시간이 빨랐고, 인근 중학교들이 소풍을 떠나 다행히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역대 세계 지하철 참사 중 4번째로 많은 사망자를 남긴 사건이다. 불행히도, 같은 기록 2위는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다.

 

 

 

10. 1974년 11월 3일 청량리 대왕코너 화재

 

- 88명 사망, 32명 부상

 

- 새벽 2시 50분경, 청량리역 앞 로터리의 대왕코너 건물 6층 브라운호텔에서 전기 합선으로 불이 났다. 같은 층 나이트클럽 손님들이 크게 희생당했다. 특히 나이트클럽 종업원들이 문을 막아서서 '돈을 내고 나가라'고 하여 희생규모가 커졌다. 88명이 사망했는데 6명은 불길과 질식을 피해 투신하다 사망하였다.

 

- 대왕코너 건물은 사건이 있기 2년 전, 1972년 8월 5일에 한차례 불이 나 6명이 사망한 바 있었다. 그 후 정부가 여러 차례 화재 예방을 위해 인화성 물질을 치우고 소방시설을 구비할 것을 명령했으나 건물주가 무시한 것이 드러났다. 인간의 학습능력은 놀랄만큼 낮았다. 1975년 10월에 대왕코너에서 또 불이 나면서 3명이 사망했다.

 

- 1999년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사건은 대왕코너 화재와 매우 유사했다. 돈을 내기 전에 나갈 수 없도록 종업원들이 문을 잠그면서 많은 고등학생들이 목숨을 잃었다.

 

 

 

11. 1993년 3월 28일 부산 구포역 열차 전복


- 78명 사망, 198명 부상


- 3월 28일 오후 5시 29분, 부산 구포역 인근에서 철로 지반이 무너져 내렸다. 기관사가 이를 발견하고 급제동을 걸었지만 너무 늦어 열차가 전복, 탈선되었다. 승객 620명 중 78명이 사망하고 19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 이 사건은 삼성종합건설이 철로 밑에서 공사를 위한 발파작업을 철도청과 아무 협의 없이 진행하면서 발생했다. 철로 밑 지반에서 발파작업을 하는데 그 곳을 지나가야 할 열차가 아무 통보도 받지 못한 것이다. 어이 없는 사건인데, 국내 열차 사고 중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사건이다.

 

- 많은 국민들이 1993~1997년 김영삼 정부 시대를 대형사고가 유독 많았던 시기로 기억된다. 이 글에서 소개된 11개의 사건 중 5개가 YS 집권기에 터진 사고였다. (박정희 3개, 김대중 2개, 이승만 1개) 그 뿐 아니라 성수대교 붕괴, 충주호 여객선 화재, 해남 아시아나 민항기 추락 등 많은 사건들이 이 시기에 터졌다. 구포역 열차전복 사고는 YS 취임 1달만에 터졌던, 이상하리만치 연속적으로 터진 대형사고들의 시작이었다.



* 마무리하며...


사망자수 2, 3, 4위에 나란히 해상 여객선 침몰 사고가 있다. 그만큼 바다가 위험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3개 사건 모두 수용가능정원을 넘어선 과다인원이 배에 탑승하면서 발생한 사고였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희생했다고 볼 수 있다. 


50년대 창경호의 경우에는 사건이 발생한지 3년이 지나서야 선체를 인양했다든가, 정확한 사망인원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기술과 경제력이 대단히 열악한 시대의 일이었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90년대에도 사실상 똑같은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 아니겠는가.


2번의 지하철 사고가 10위 안에 들어있다. 그것도 같은 도시에서 일어났으니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두 사건은 각각 런던 지하철 테러보다 많은 사망자를 냈다. 테러보다 무서운 사고가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사망자 10위 안에 드는 사고들은 대부분 선박, 비행기, 열차, 지하철 등 운수기관이다. 사실 버스 추락사고도 많은 사상자를 낸다. 운수기관들은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위험이 그만큼 높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건축물은 비교적 안정적이며 사고의 진행 속도가 길기 때문에 어느 정도 대피가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삼풍백화점 붕괴가 얼마나 참담한 사고인가. 누가 봐도 건축물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던 그날 오전에만 영업을 중단했으면 아무도 사망하지 않았을 일 아니었는가. 

* 세월호 침몰

정말 참담한 일이다. 53년 창경호, 70년 남영호, 93년 서해훼리호에 이어 20여년 간격을 두고 또 한번의 대형 선박침몰 사고가 발생했다. 21세기 선진국 대열에 가까워진 대한민국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사고가 또다시 일어났다.

세월호 침몰의 양상은 이전 사고들과 비슷한 점이 많다. 과적과 변침. 이전 사고들처럼 수용가능인원보다 많은 승객을 태우진 않았으나, 수용가능량의 3배에 달하는 화물을 실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또한 서해훼리호와 마찬가지로 급격한 방향전환이 직접적 원인이었다. 서해훼리호는 기상악화가 방향전환의 이유였는데, 세월호는 아직 급격한 변침의 사유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경험이 적은 항해사가 키를 잡고 있었다는게 드러난 상황이다.

​지금 세월호와 관련하여 국민들의 분노가 크다. 특히 앞장서서 도주하여 목숨을 부지한 이준석 선장과 선원들의 행태가 공분을 사고 있다. 서해훼리호 사건 당시에는 백운두 선장의 행방이 묘연하여 각종 도주설이 나돌고, 경찰도 백 선장을 지명수배하였다. 그러나 서해훼리호 선체를 뭍으로 인양하자 사람들은 백 선장이 배와 운명을 같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백 선장의 미망인은 뒷날 "그 사실을 듣고 남편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승객수 및 희생자수 통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우왕좌왕한 것 등은 서해훼리호 사건 당시에도 있었던 일이다. 그때도 분노한 유족들이 서울에서 정부 항의시위를 한 적 있다. 유언비어가 많이 떠돌아다닌 것도 공통점이다. 다만 인터넷, SNS라는 매체의 특성 때문에 유언비어의 양과 확산속도가 훨씬 커진 면은 발견된다.

세월호 총 승객수는 현재 ​476명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179명이 구조. 창경호, 남영호, 서해훼리호에 비해 훨씬 많은 숫자였다. 이전 3번의 사고에 비해 생존자 수가 상대적으로 많다고 볼 수 있다. (창경호 236명 중 7명 생존, 남영호 338명 중 12명 생존, 서해훼리호 362명 중 70명 생존) 179명이 구조된 것은 불행 중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는 해경의 초기대응을 비판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사고가 터지고 국무총리와 장관이 진도에 내려온 뒤에 지휘체계가 우왕좌왕하는 모습, 유족들에게 구조작업의 진행상황에 대해 충분히 설득하지 않는 모습 등 정부가 남긴 아쉬운 행태는 비판받지 않을 수 없다.

참 아이러니한 차이점이 하나 있다. 서해훼리호의 경우에는 사람이 배의 공간을 가득 메울만큼 많이 탑승해 있었고, 그 승객들이 우왕좌왕하면서 희생이 커졌다. 그러나 세월호는 오히려 선원들의 안내대로 내부공간에서 착실히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서해훼리호에는 없었던 안전요원도 세월호에는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고도 사망했다.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이 서둘러 도주하지 않고 선박에 남아서 지휘했다면 희생자를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안타까움이 크게 남는다.